주방 뒤 베란다의 한켠에는 낡은 냉장고가 하나 있습니다. 아내는 이 냉장고에 신김치나 생수 등 자주 꺼내지 않는 음식들을 보관해 놓고 있었습니다. 1998년도에 결혼할 때 아내가 버리자고 했던 미니냉장고입니다. 그런데 제가 극구 만류하여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써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내가 냉장고의 냉기가 없어졌다며 저를 부릅니다. 음식들을 꺼내고 이리저리 살펴보니, 노란 액체가 흘러내린 것이 보입니다. “어딘가 고장이 났구나!” 생각하고는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아내가 한소리 합니다. “이제 그만 버리자.”고 말입니다.
지금껏 고장 없이 잘 버텨 와준 미니냉장고, 그러고 보니 쓸 만큼 썼습니다. 그동안 사용하면서 잔고장이라도 나고 그랬으면 진즉에 버렸을지도 모르는 미니냉장고입니다. 오랜 세월 정도 많이 쌓였는데, 버리자니 이 녀석이 좀 측은해 보이기도 합니다. 손 때가 묻은 냉장고를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스티커에 제조년월이 눈에 들어옵니다. 1985년 생산된 제품입니다. 24년이란 세월을 저하고 같이 한 셈이네요.
중학교 시절에는 집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학교를 다녔지만, 고등학교부터는 집을 떠나 살면서 자취를 하여야 했습니다. 당시의 자취생활이라 해봐야 별것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석유곤로를 이용하여 밥을 해 먹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밥솥이란 걸 썼던 기억이 납니다. 국이라고 끓여봐야 콩나물에 두부 몇 조각 뚝뚝 썰어 놓고는 간단하게 만들어 먹거나, 촌에서 장만해온 나물에 된장 풀어 넣어 된장국을 만들어 먹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시장에서 파는 멸치볶음과 어포 볶음, 그리고 간단하게 먹기 좋은 계란후라이에 김치가 전부였었죠. 물론 저보다 더 오래전에 자취생활을 경험하셨던 분들이 보기에는 괜찮은 생활했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저희 때는 이랬습니다. 김치는 일요일에 부모님 께 찾아가면 어머니께서 해주시곤 했는데, 항상 맘에 안들었던 부분이 쉽게 익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김치라고 하죠.
냉장고가 주인을 잘 만난 탓인지 모르지만 별다른 고장도 없었습니다. 결혼하기 전 까지도 늘 함께 하다가 결혼하면서 버릴까 하다가도 어렵게 장만해준 어머니 때문에 쉽게 버리지 못했는데, 이제야 제 명을 다했습니다. 고쳐서 쓴다면야 못쓸 것 없겠지만, 서비스센터에서 왠 청승이냐 할까봐, 이제 아내 말을 듣고 버리려합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버리지 못하게 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정도 썼으면 저승에 계신 당신께서도 아무런 불만이 없으실 겁니다.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무척 생각나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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